[우츠마에] Dreamy Baby
Dreamy Baby
우츠로X마에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니라
* * *
너가 문장을 읊는 소리가 물 속 같은 이 공간에 천천히 울려 퍼졌다. 문장을 읊는 입술 새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이나 구원은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당장 몇 분 후에 세상의 종말이 와도 좋았고, 뜬금없이 유토피아가 펼쳐져도 좋았다. 나는 그저 가만히 죽은 물고기처럼 누워 너를 바라보고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애써 살아있는 것처럼 헤엄치지 않아도, 숨쉬지 않아도 괜찮았다. 여기는 살아 있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그와 동시에, 모두가 죽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선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 피곤함도 느낄 수 없다. 그러니까 굳이 맛없는 식사를 목구멍 너머로 밀어넣지 않아도 됐고, 차갑게 타오르는 불면증을 끌어안고 이불 속에 웅크릴 일도 없었다. 계절과 지금 이 공간의 온도와 습기가 어떻던 간에 아무런 느낌도 받을 수 없다. 모든 신경세포가 투명한 막에 싸인 것처럼. 이곳은 다가가서 잡으려 하면 곧 사라져버릴 신기루와도 같았다. 눈을 뜨면 모두 사라져버릴 찰나의 풍경이다. 과연 카메라로 찍힐 정도의 길이일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파노라마 촬영으로 무수히 많은 사진을 찍어댄다 해도,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나는 가만히 누워 눈을 한 번 깜빡이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이 지나가는지를 가늠해 본다. 혀가 조심스럽게 튀어 올라 입천장을 한 번 두드리고 내려오는 것, 코로 들어온 들숨이 목구멍까지 다다르는 것, 내뱉은 숨이 물에 풀어진 물감처럼 느리지만 빠르게 퍼져 나가는 것, 곧 감기려는 눈꺼풀이 다시 파르르 쳐들리는 것,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리는 것……감긴 세계에서는 또 하나의 세상이 지나가는 것이다. 단칸방 정도나 되는 이 공간에서도 나는 이미 몇 백개의 세상을 놓쳐 버렸고, 몇 백개의 세상과 함께 몇 백개의 너도 눈꺼풀 밑의 어둠에 밀려 나가면서 사라졌다. 내 망막에 새겨진 순간은 우주만한 세계에서 티끌만큼 작다. 나의 밖에 있는 세계에서 너는 이제껏 무엇을 했고 앞으로 무엇을 할까. 눈을 그대로 너에게 고정시킨 채, 그런 생각을 했다.
너는 아무 말 없이 책을 덮었다. 다음에 할 일이 생각이 안 나는지 잠깐 멍한 눈빛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할 일이라곤 벽과 바닥을 가득 채운 문장, 혹은 쌓인 책을 읽는 것밖에 없었으므로 사실상 너가 다음에 할 일도 정해진 셈이다. 너는 다른 책을 펼쳐들었다. 나는 여전히 누운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너의 입이 열리고 또다른 문장을 읊는 너의 목소리가 이 공간을 가득 채우자, 저절로 눈이 감긴다. 작은 어항 속에서 동면하는 기분이다. 보이지도 않는 여과기가 이곳의 시간을 끊임없이 섞고 있었다.
몸은 움직이지 않은 채로 눈만 굴리며 훑어 본 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짐작할 수 없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단 하나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공간에 가득 차 넘실대는 듯한 눅눅한 냄새였다. 물에 젖어 오그라든 종이에 코를 대면 나는 그 냄새. 어쩌면 이곳을 이루고 있는 건 수많은 책의 페이지일지도 모른다. 이곳의 바닥과 벽은 누군가가 말하고 생각했었던 물기 어린 문장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이 공간에 왜 그러한 문장들이 있는지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생각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나는 걸신이 들린 것처럼 끊임없이 빈 속에 무언가를 채울 뿐이었다. 내심 어항 속의 배고픈 물고기처럼 너가 문장을 읽어주는 것을 기다렸다. 입술과 혀가 잠시 멈출 때면 재촉하고 싶어질 만큼 애가 탔다. 이곳에 너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 순간조차도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시간도 멈추고 한계가 정해지지도 않은 공간 속에서 나는, 너가 읽어주는 그 문장들을 정신없이 주워 먹으면서 정신의 허기를 채웠다.
그렇게 허기를 채우고 나면 기나긴 잠을 잔다. 어떤 때는 눈을 감자마자 잠이 몰려들었지만 어떤 때는 책 하나를 다 읽도록 눈이 감기지 않았다. 너 또한 나와 같이 나란히 누워 잠을 자는가 하면 어떤 때는 내가 잠들었다 다시 일어날때까지 길게, 길게 책을 읽곤 했다. 서로 간의 대화는 없었다. 나는 그저 너가 찬찬히 문장을 읊는 와중에 눈을 떴고 어느 순간 이곳에 와 있었기 때문에 굳이 너에게 말을 걸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이곳은 어디인지, 너는 왜 내게 책을 읽어주고 있는지, 사실 물어볼 것은 많았지만 왠지 모르게 우리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쩌면 너가 나를 볼 수 없는지도 모른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 있지만, 그 누구도 먼저 손을 뻗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서로의 눈동자가 살짝 스쳐 지나간 적은 있었으나 순간일 뿐, 대부분은 일방적으로 내가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문장에만 코를 박고 웬만하면 다른 것들과 전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여기서 나는 영혼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너를 만지려고 해도 연기처럼 내 손이 너의 몸을 통과해 버릴 것 같았다. 내가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도, 너의 움직임은 변함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조만간 이 기이한 평온을 깨부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얌전히 놓인 케이크의 크림을 흐트리고 싶은, 그런 어린애같은 욕구에 휩싸이는 것이다. 내가 손을 뻗어서 네 어깨를 건드리면 어떻게 될지, 성대를 크게 울려서 책을 읽는 네 목소리 위로 내 목소리를 덧씌우면 어떻게 될지, 눈이 마주친 게 절대로 실수가 아니라는 듯 집요하게 너의 눈동자를 좇아 가면 어떻게 될지. 너와 내가 이제껏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이 평화를 거리낌없이 부수는 것. 잔잔히 가라앉은 공기를 휘저어 혼돈을 일으키는 것. 그제야 비로소 심장이 뛰는 듯했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이른바 이 세계의 빅뱅이 되는 것이 아닐까.
너의 이름을 알고있다.
너랑 나는 초면이 아니다. 너도 나의 얼굴을 알고 있을 것이고, 나 또한 너의 얼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친밀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나는 너의 가족 관계도, 어떤 곳에 살고 얼마만큼의 시간을 살아왔는지도, 어떤 학교에 다니고 어떤 생활을 하는지도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말 한번 섞어보지도 않았는데 너의 대부분을 알고, 너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야말로 기묘한 관계.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아직 너의 눈은 조금의 미동도 없다. 이 정도의 움직임은 늘상 있는 것이라서 딱히 신경쓸 이유도 없다는 것이겠지. 이번에는 손을 바닥에 짚어, 몸을 네게로 향한다. 가까이 다가앉아 책 위로 손을 내려 문장을 가리고 너의 이름을 가만히 읊어 본다. 마에다 유우키. 그제야 눈이 찢어질듯 크게 뜨이고, 끊임없이 달싹거리던 입술이 멈췄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점차 가라앉을 즈음에 너는 정말로 몰랐다는 듯이 물었다.
너, 말할 수 있어?
*
차가운 밤의 사막에 내쳐진 기분이었습니다.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딘지도 모릅니다. 사막이라고는 했지만 바닥이 모래인 게 확실하지 않았고, 밤이라곤 했지만 어둡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고, 차갑다곤 했지만 온도를 감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어둠이었습니다. 이곳은.
그래요, 이곳은 태초의 세계처럼 깊은 어둠만 가득했습니다. 나는 그저 웅크리는 것밖에 할일이 없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내 몸이 씨앗처럼 보일 만큼 깊숙히 웅크렸습니다. 메마른 등을 끌어안은 팔과 힘껏 오므린 다리에서 뿌리가 돋아 내 몸에 깊게, 더 깊게 파고들어 올 것만 같았습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데 바깥으로부터 왠지 모를 한기가 스며와 저절로 몸이 곤두섰습니다. 나는 상처 입은 고슴도치처럼 한없이 안으로만 파고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겨울잠을 잔다. 단순히 동면하는 것 뿐이다. 언젠가는 봄이 올 것이고 다시 구부린 몸을 펼 날도 올 것이다. 누구한테 좋은건지도 모르는 위로를 되뇌이며 멈춘 시간을 버텼습니다.
그렇게 얼만큼을 있었는지 모릅니다. 저절로 눈이 뜨이면 다시 감고, 어느새 힘이 풀린 몸을 다시 꽉 끌어안아 웅크리는 것의 반복이었습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나의 정신이 점점 죽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눈을 감으면 그대로 죽어버릴 것 같은데 죽지 않는 것, 그것이 너무도 끔찍했습니다. 어째서 이 세계는 나에게 무한한 시간을 허락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두려움에 웅크리는 것 뿐인데 말입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어렴풋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 이 세계 자체가 나한테 맡겨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만약 이 세계의 신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서 이 지독한 정적을 뚫을 수 있다면. 나는 천천히 웅크렸던 몸을 폈습니다. 웅크린 채로 굳어버릴 것만 같았던 몸은 의외로 가뿐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자 온 세계를 가득 덮은 어둠이 고요하게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마치 고인 물처럼, 순환하지 못하고 한 곳에 가만히 뭉쳐 있기만 했습니다.
나는 고인 채로 흘러가지 않는 이 세계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습니다. 일단은 이 어둠을 걷어내는 것이 먼저였고, 어떻게든 3차원의 공간을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잠깐 가졌던 의지였는데도 순식간에 이 세계는 바뀌어 갔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이곳은 내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무중력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아니라, 바닥을 딛고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바뀐 것입니다.
*
너와 내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이후로, 문장을 읽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아무런 의미 없는 대화를 하는 것이 다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세계의 시간이 조금 더 풍성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 후에는 침묵을 지키는 것조차 그 전과는 의미가 달라졌으므로 나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너의 시선이 사뿐히 나의 눈꺼풀에 와 닿는다. 너는 내가 피곤해 보인다고 했다. 눈이 막 감기려는 참이라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확실히 나는 잠들고 싶었다. 깨어 있는 시간이 지겨웠고, 그건 언제 어디서나 그랬다. 현실이 견디기 버거워서 끊임없이 더 안으로, 더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것 같았다. 제 살을 파먹어가는 쥐와 같이 도망칠 곳이 내 속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미친듯이 그 안으로 나 자신을 쑤셔넣었다.
사실 누군가와 접촉하는 것 자체도 내게는 너무나 어색한 일이었다. 간단한 몸의 움직임을 전달받고,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해석하고, 말을 경청하고, 그에 맞는 말을 다시 되돌려주고 하는 것들이 너무 벅찼다. 잠깐 대화한 것만으로도 피곤해져서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너는 너가 원하기만 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볼 수 있고, 어떤 것이든 먹을 수 있다고 했지.
너는 몸을 뒤로 젖혀 천천히 등을 바닥에 댄다. 우리는 나란히 누워 닫힌 천장을 바라봤다. 작은 상자에 담긴 것처럼, 천장은 빈틈없이 닫혀 있다. 만약 벽에 구멍이라도 뚫려 있었다면, 영락없이 어린왕자에 나오는 상자에 갇힌 양이 되었을 것이다. 상자 밖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상자 밖에서는 우리의 상자를 보고, 이곳에 우리가 있다고 짐작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상자 밖에서 봤을 때 어떤 양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런데 왜 여기는 이렇게 좁은 거야?
너는 나를 향해 돌아 눕는다. 흔들림이 없는 눈동자를 보고 악의 없는 질문이란 걸 알았다. 너의 질문은 악의가 없지만 늘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질문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난 후에는 더 많은 질문을 퍼부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개의치 않았지만 어떤 때는 끝까지 대답을 바란다는 듯 지긋하게 나를 바라보곤 했다.
나도 잘 몰라. 내가 이제껏 살아 온 시간이 짧은 것도 아닌데 말이지.
내 속에 담긴 건 보잘 것 없는 것들 뿐이었고 그마저도 내버려야 할 것들이었다. 약간의 분노, 질투, 원망 같은 것들. 그 감정들은 내 속에 가득차보지도 못한 채 구석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기만 했다. 미처 자라지 못한 희미한 감정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그 대답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내게는 의미가 없다. 심지어 당연히 가져야할만 한 감정까지도. 왜 의미가 없는 건지는 모른다. 그것까지 생각해보기엔 내가 너무 지친 것 같았다.
너는 내가 눈을 감는 걸 보고 다시 천장을 보며 누웠다. 가벼운 숨소리만이 오갔다. 의식이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서서히 멀어져갈 무렵 너의 입이 다시 열렸다. 질문도 아니고, 반응해주길 바라는 말도 아닌 그저 혼잣말이었다.
내가 처음 여기 왔을때는 너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뭘 해야할지 고민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다였어.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감도 잡히지 않았지. 어떻게든 시간을 때울 것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그마저도 지겹고 힘들었어……원래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닌데 할 거라고는 책 읽는 것밖에 없으니까.
그 다음 말은 천천히 흐려져 갔다. 눈을 뜨면 또 무슨 세계가 열려 있을까. 너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 그대로의 모습일까. 너 또한 눈을 감을까. 너도 같이 눈을 감고 다시 새로운 세계를 열까.
*
나는 아마 마취된 것일지도 모른다. 마취되어서 긴 꿈을 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디가 꿈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이 손바닥만한 세계에서 너와 함께 있는 게 꿈인 걸까, 아니면 내가 믿지 못할 힘을 가지고 절망을 좇았던 게 꿈인 걸까. 아무래도 후자가 조금 더 꿈에 가깝지 않을까. 그런 초능력 따위 믿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 또한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가끔 생각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하고. 전생의 죄를 받고 있는걸까. 적어도 이 정도의 운명을 받으려면 나는 그에 걸맞는 죄를 저질러야 하지 않을까. 이런 건 절대로 납득할 수 없다.
날 이렇게 만든 신을 저주해.
*
아직 세계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바닥을 딛고 설 수 있었지만 어둠밖에 없어서 바닥이 있다는 사실 외에는 내가 웅크리고 있었던 과거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건 여전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서 무질서하고, 그 무엇도 정립되지 않은 이곳을 묶을 그 어떤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곳에 독립적인 공간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서 아무렇게나 막 가져올 수 있는 것. 그것은 문장 뿐이었던 것입니다. 시대를 초월한 철학, 문학뿐만 아니라 이곳으로 가져와도 썩지 않고 녹슬지 않는 문장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긁어모았습니다. 나는 깊게 생각도 하지 않고 무조건 채워넣었습니다.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서 버틸 수 있는 것들.
그 채워넣은 문장들을 보이는 대로 곱씹으면서 또 세지도 못할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는 이 세계에서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냈던 걸까, 짐작도 불가능했습니다. 놀랍게도 정신은 또렷했습니다. 이쯤 되면 미쳐버릴 법도 한데, 나는 끝까지 제정신으로 생각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특권일까요.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문장을 되새기다 지치면 나는 생각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저 끊임없이 생각했습니다. 생각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요.
기억 자체는 선명했지만 조각나 있어 시간을 두고 찾아야 했습니다. 어떤 때는 처음으로 봤던 모래사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쌓인 바다가, 어떤 때는 가볍게 즐겼던 게임이, 어떤 때는 학교에서 배웠던 것 같은 수식들이 떠올랐습니다. 가족들의 얼굴도 선명하게 나타났다가 천천히 흐려졌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그 기억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때로는 갑작스럽게 생각난 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 시를 읊으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세계는 언제 끝나는 것일까요. 나는 얼만큼의 시간을 더 보내야 할까요. 스스로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때 당신이 툭 떨어진 것입니다.
문장에서 눈을 떼고 쉬려 했을 때, 죽은 듯이 누워있던 당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건 나의 육체가 아닐까 하고 수십 번 생각했을만큼 나와 너무도 똑같은 당신이.
*
어느새 호화롭고 멋들어진 식사가 식탁 위에 차려져 있었다. 과연 이 모든 음식을 맛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음식들이 식탁 위에 가득 채워졌다. 너는 맛있어 보이지, 하면서 즐겁게 식탁 앞에 의자를 끌고 앉았다. 너의 발이 기쁜 것처럼 빠르게 동동 구르고 있다. 그걸 흘깃 바라 본 나는 나한테 맛있는 음식따윈 없어, 하고 가볍게 투덜댔다. 상관없다는 듯이 너의 포크가 내게 음식을 내민다. 바보같긴. 그건 너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음식 위에 달큰한 소스처럼 얹어졌다.
나는 코 앞까지 다가온 위협적이고도 풍미 가득한 의미에 잠시 멈칫한다. 세상에 질려버리고 나서는 단 한번도 제대로 생각해본 적 없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내 입을 벌리고 그 새로운 의미를 수긍했다. 입 속에 들어온 그 음식은 녹아들어 부드럽게 입 안을 채워 갔고 특유의 묵직한 향기가 금세 코까지 들어찼다. 뜨끈한 온도가 혀부터 목구멍 너머로까지 천천히 퍼져 갔다. 기분나쁘지 않을 정도의 씁쓸함과 속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달콤함, 혀를 가볍게 쥐어짜는듯한 짭짤함이 한데 뒤섞여 강한 폭발을 일으킨다. 혀에 있는 수많은 미뢰를 하나씩 상냥하게 훑고 지나가는 듯한 맛이었다. 너는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똑같이 음식을 입 속에 집어넣었다.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어색함과 불편함이 그 맛을 잠깐 가로막았지만 그마저도 별 문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생소했다. 이 세계가 꿈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수도 없이 고민했어도 지금만큼은 당연히 꿈이구나, 하고 생각할 만한 일이었다.
*
당신이 이곳에 온 이후로 나는 문장을 읽는 것도 내팽개치고 죽은 듯한 당신을 열심히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당신은 나와 너무도 닮아 있었습니다. 나는 내 냄새를 맡을 수 없어서 당신의 체취가 나의 체취와 다른지도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몰래 만져 봤던 옷은 내 것과 똑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누군가 복제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게 똑같았습니다. 내가 신은 신발의 작게 까진 부분까지도 똑같았습니다.
당신은 누구일까. 무한한 시간에 지쳐버린 내가 결국엔 죽어버린 것일까. 나는 새로 태어난 것일까. 새로운 고민이 머리에 들어차자 나는 또 수없이 많은 시간을 그 고민에 대해 생각하는 데 보냈습니다. 이걸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난 것일까요. 나는 여전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자라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자랐더라면 지금 이방은 나의 머리카락으로 가득 찼을 것이고 손톱은 어렸을 때 무서워했던 괴물처럼 흉측하게 길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자라지 않았습니다. 내가 당신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당신의 손톱이 자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머리카락도 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빠르지는 않았지만 자세하게 바라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차이였습니다.
당신은 자랍니다.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동안에도 자라고 있습니다. 나는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숨쉬는데 자라지 않고, 당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자고 있는데 자랍니다. 어쩐지 슬퍼져 나는 곧 생각을 그만뒀습니다.
*
꿈은 확실해 보이면서도 흐릿하다. 시간을 짐작할 수 없다. 그 날이 어떤 날이고, 어떤 시간대고, 어떤 계절인지 알 수도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모든 세계는 꿈인데 어째서 너만큼은 너무도 확실해 보이는 걸까. 어째서 나는 너의 존재만큼은 확실하게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걸까.
문득 내가 그걸 묻자 너는 직접 느껴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잖아.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볼 수 있으니까 나는 사실인 거야. 꿈에서 나온 사람들의 목소리와 얼굴까지는 기억할 수 있더라도 그 사람의 향기를 기억할 수는 없잖아. 그 사람이 입은 옷의 촉감조차도 기억할 수 없지. 하지만 나를 봐봐. 너도 마찬가지야.
너는 내 옷깃을 잡았다. 적당히 까슬까슬하고 부드러운 조끼의 감촉일 것이다. 나는 그 감촉을 충분히 알고 있어서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옷에선 희미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겠지. 적당히 다려진 와이셔츠는 빳빳한 느낌보다는 쉽게 미끄러지는 느낌이 날 것이고, 가볍게 맨 넥타이는 부드럽지만 날이 선 듯한 느낌이 나겠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옷 특유의 냄새와 살갗의 냄새, 그리고 몸담고 있던 집의 냄새가 섞여서 다른 사람에게는 나지 않는 오로지 너만의 냄새가 날 것이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 또한 너처럼 너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너는 똑같은 옷을 입은 게 신기하다는 것을 핑계로 늘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듯이 옷을 만져보았다. 어떻게 그런 능력이 있을 수 있느냐고 감탄하면서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눈동자의 색뿐만 아니라 동공의 크기, 모양까지도 완벽하게 닮은 눈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정말로 모든 것이 나와 똑같이 닮아 있다면, 내쉬는 숨결도 나랑 똑 닮아 있겠네.
한참을 확인해보던 너가 물러나 앉은 뒤 한 말이었다.
몸 속의 장기도, 심장도 똑같으면 맥박이 뛰는 것도, 심장이 뛸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피도 전부, 전부 같겠네. 그 피가 흐르는 시간도 똑같겠구나. 심장이 뛰는 소리도 똑같겠지? 같은 심장이니까.
나는 별다른 말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너와 같은 깊이의 숨을 내쉬고 있다는 것이, 혈관에 흐르고 있는 피가 너와 같은 속도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 너와 똑같이 생긴 심장으로 살아 있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
눈이, 눈이 너무 뜨거웠어. 피가 흐르는 지도 몰라. 포트에 올려놓은 물은 다 끓었어. 아니, 이젠 전부 식어버렸을 지도 모르지. 다리가 부러진 것처럼 움직이지 않아. 실제로 부러진 게 아닐까. 나의 핏줄과 그 속에서 흐르는 피가 전부 얼어붙었어. 그런데 왜 이렇게 고동소리가 크게 느껴질까. 손톱에서까지 심장박동이 느껴져. 움직여야 돼.
이거, 강도인가? 그렇다면 어디에 전화해야되지? 그 전에, 전화기가 어디에 있더라. 아, 저기 있다. 그런데 닿지 않아. 손이 덜덜 떨려. 경찰 번호가 도저히 기억이 안 나. 엠뷸런스라도 부르는 게 나을까 싶었는데 그 번호도 몰라. 친척 번호? 친구들 번호? 아무나 좋으니까 어떤 사람의 번호? 몰라. 하나도 모르겠어. 이렇게 되면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어. 그런데 문도 안 열려. 창문까지 전부 확인했는데 누군가 밖에서 잠가버린 것처럼 열리질 않아. 이럴 땐 소리라도 질러야 되는데 목소리도 안 나와. 이래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잖아.
머리가 어지러워. 역겨워. 끔찍해!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야. 엄청나게 현실적인 꿈일 뿐이야. 비디오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그래, 그래서 이런 꿈을 꾸는 걸 거야. 근데 왜 일어날 수 없지? 꿈에서 깨어날 수 없어. 이곳에서 내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어. 계속 이 끔찍한 광경으로 돌아와버려. 보고싶지 않아. 속이 울렁거려. 피 냄새가 가시질 않아. 토할 것 같아. 시계소리가 너무 거슬려. 이건 전부 나 때문이야.
*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너를 보면서 항상 궁금했어.
너는 그렇게 말하면서 유리를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너의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손길이 손등부터 도드라져 나온 뼈를 지나, 처음으로 손가락이 굽어지는 마디, 그리고 날카롭지만 둥글게 솟아 나온 초승달 모양의 손톱까지 찬찬히 어루만졌다. 무르익은 잎사귀가 살갗을 스치는 것처럼 아주 섬세하고 부드러운 몸짓이었다.
다시 뻗어 나온 다섯 갈래의 가지를 타고 손등까지 올라온 너의 손은 내 손등을 받치듯이 감싸 안아 손바닥을 보이도록 뒤집었다. 그건, 이제껏 살아온 삶의 나이테를 보이는 것처럼 어쩌면 수치스럽고 낯간지러운 일이었다.
손톱의 길이, 손가락의 길이, 튀어나온 핏줄, 태어날 때부터 조각하듯이 그려낸 듯한 손금, 고요하지만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지문,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 정도로 미세한 주름까지 나와 완벽하게 닮아 있을까, 하고.
너의 입술이 손바닥의 가장 움푹한 부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경의를 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멩세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 같기도 했다. 얇은 살갗에 닿은 입술의 주름도 나와 똑같이 닮아 있을지 궁금해졌다.
너의 입술은 가을을 맞아 물렁해진 열매처럼 손바닥 위에서 가볍게 짓눌린다. 움푹 패인 손바닥에 촉촉한 흙을 차곡차곡 포갠 듯한 기분이었다. 너의 입술 안에 담긴 혀도 나와 닮았을까. 차분하게 문장을 읽는 입술 너머로 슬쩍 비치던, 잘 익은 과육처럼 생기가 넘치던 혀. 발레의 동작을 차분하게 따라하듯 움직이는 그 혀를, 나는 똑같이 복제할 수 있었을까.
사람마다 나는 체취도 달라. 그리고 그 사람한테서 나는 체취도 여러가지지. 머리카락, 볼, 목덜미, 손, 팔뚝, 배……만약 사람도 개만큼 후각이 발달했다면 더 피곤했을거야. 수억 개의 체취를 구분해내야 하니까. 개처럼 코를 묻고 한참동안 냄새를 맡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의 자취도 찾을 수 없겠지.
*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 밖의 나는 어떻게 됐니.
멀쩡히 살아가고 있니. 어쩌면 잘 다린 수트를 차려입고,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정신없이 제 몫의 일을 하고 있니.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웨딩카펫을 밟고, 혹은 밟지 않고 누군가와 가정을 꾸려서 나름대로의 평화를 만끽하고 있니. 몸을 움직이는 게 힘들 정도로 노쇠해서 죽을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겨울의 나무처럼 말라가고 있니. 아니면, 그 정도의 미래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로워서 기계에 생명을 내맡긴 채 간신히 숨만 유지하고 있니. 그것도 아니면, 당신에게 아무렇지 않게 제 삶을 말해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의 체계가 모조리 부서져 있니.
내가 조약돌만한 손으로 천천히, 지금 너와 똑같은 손으로 침착하게, 안정적으로 쌓아오던 나의 삶은 대체 어떻게 된 거니.
손을 대면 베일 것처럼 깔끔한 와이셔츠 차림의 나를, 일생에서 가장 화려한 정장을 차려 입고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운 나를, 최대한 부드럽고 따스한 옷을 꿰어입고 창밖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나를, 아니, 지금 이 상태로 교복을 입은 나를 상상하는 것조차 허락될 수 없니.
이제 나는, 너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니.
*
나중에는 아직도 약간 헐렁한 교복이 딱 맞게 되어서, 어깨가 자라고 생각이 커져서 누군가를 헌신적으로 지키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에겐 구원자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자라고 싶지 않았습니다. 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나 자신조차도 모르고 있는 깊은 심연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 갇혀서 끝없이 안으로만 파고들던 때. 웅크린 내 모습 그대로 덩어리져 똑같이 암흑이 될 것만 같았던 때.
선택권은 없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그 사람뿐이다. 오로지, 그 사람만이 나의 세계에 존재한다.
너무 오랫동안 담아두고 있느라 소모되지 못한 감정들이 내 몸 바깥으로 굴러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감정 앞에서 너무도 연약했습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인 내가 그 감정을 이기고 이 시간, 이 세계를 버텨낼 수 있을거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가능할까. 내 세계에 있는 유일한 사람과 소통하지 않는것이. 아무런 대화도, 감정도 주고받지 않는 것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
어떤 날에는 밤새 아팠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또 어떤 날에는 아픈 걸 잊어버리려고 죽은 듯이 잠을 잤다. 그 두 가지의 반복이었다. 너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을 때, 나는 늘, 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다. 나는 늘 아팠다. 그런데 그게 아픈 건지도 모르고 살았다. 너는 아플 때 혼자 있는 게 제일 서러운 일이라고 중얼거린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언제나 서러워하며 살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너무 아픈데, 그게 왜 아픈지 잘 모르겠어. 아니, 이유를 알고싶지도 않아. 해결방법이 없으니까. 그냥 모르는 척 하면서 앓는 게 제일 나아. 그래야 아무런 생각없이 아플 수 있지.
너는 말없이 내 머리카락을 만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너는 그냥 궁금해서, 라고 말했다.
뒤통수 쪽에 머무르던 손이 점차 내려와 귀에 닿았다. 조심스러운 손끝의 감촉이 간지러우면서도 나른했다. 동물이 상처를 핥는 것처럼 안타깝고 어딘가 마음이 아픈 손길이었다. 나는 그저 복잡해보이는 너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너, 머리가 조금 긴 것 같아. 키도 좀 큰 것 같고. 이거 봐, 나보다 소매가 조금 더 짧잖아. 너는 그렇게 말하면서 소매, 걷어줄까, 하고 말했다.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너는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소매를 적당히 걷어 올려서 단추까지 딱 맞게 끼운 너는 어딘가 슬픈 얼굴이 되었다. 혹 그 얼굴을 들킬까 급하게 표정을 바꾸고는, 습관처럼 말을 돌린다. 그게 너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피해가는 방식이었다.
넌 나랑 완벽하게 똑같은데, 다른 부분이 딱 하나 있어.
넥타이에 너의 손이 닿는다. 검지손가락 하나가 넥타이를 손쉽게 풀어 냈다.
넥타이. 나는 넥타이 맬 줄 몰라서, 이런 넥타이를 안 써. 학교 넥타이는 이런 모양이야.
너는 너가 맨 넥타이를 잡아당겨보인다. 너가 맨 넥타이는 직접 매는 모양이 아니라 이미 매듭지어진 넥타이를 목에 건 후 길게 달린 끈을 당겨서 고정하는 방식이었다. 너의 손은 서투르게 다시 나의 넥타이를 매려고 했지만 넥타이를 매는 법을 모르는 터라 모양이 엉망이었다.
미안. 엉망이네.
상관없었다. 나 또한 넥타이 매는 방법을 모르고, 굳이 알고싶지도 않았다. 나는 별 상관 없다고 말하며 미련이 남는듯 넥타이에서 머무르는 손을 살며시 쥐었다.
사실 이거 안 지도 얼마 안 됐어. 그건 그렇고 나를 완벽하게 복제할 수는 없다니 뭔가 안심된다고 해야하나.
가벼운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슬쩍 힘이 풀린 손아귀에서 너의 손이 스르르 빠져나가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아팠다. 너와 같이 있는데도 아팠다. 너와 같이 있는데도 그게 너무 서럽게 느껴졌다.
*
나는 한가로운 오후가 좋아. 저절로 몸이 나른해질 때면 포트에 물을 끓여서 따뜻한 차를 끓여마셔도 괜찮다고 생각해. 원래 차 같은 건 즐기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런 상황엔 저절로 마시고 싶어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차를 담은 머그컵만 두 손으로 감싸안은 채로 가만히 시간을 보내는 거야. 아니, 딱히 오후라고 못박아놓지 않아도 상관없어. 모든 세계에서 나 혼자만 깨어있는 것 같은 새벽, 해가 막 떠오를 무렵의 이른 아침, 햇살이 점차 수그러질 때쯤의 저녁, 모든 존재가 눈을 감을 준비를 하는 한밤중, 그 어떤 때라도 부릴 수 있는 여유야.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 그랬었나. 아, 그랬었지. 하고 아주 가볍게 넘길 만한 일들. 수도 없이 일어났던 그 일들을 손쉽게 뭉뚱그려서 말할 수 있는 게 좋아. 세세하게 기억해서 머리를 피곤하게 하지 않으니까. 기억조차도 긴장하지 않는 그런 일. 어쩌면 너무도 당연해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도 못하는 그런 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야.
그리고 그런 일을, 내가 제일 사랑하는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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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시간 속에서 기억이 꼬리를 물고 차례대로 되살아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꺾어버린, 처참히 짓밟은 사람이 내 눈 앞에 있었다. 아주 작은 공간에 나와 함께 있었다. 내게 수많은 시간과 철학을 담은 문장을 읽어주었다. 아무렇지 않게 나와 대화했다. 함께 식사를 했다. 서로의 살갗을 맞대었다. 눈을 마주쳤다. 다른 의도 없이, 나와 접촉했다. 나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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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의 사랑은 애매합니다. 질척거리고, 나약하고, 가냘픕니다. 나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늘 고민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또다른 내가 노려보듯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걸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셀 수도 없는 시간을 보내고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의 기억입니다. 어떤 사람으로 인해 어린 볼이 빨갛게 물들던 날이었습니다. 아직은 태양이 다정하게 따뜻할 때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엔 조금 일렀던 그 계절. 아마 그때의 저는 병아리의 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청소년으로 막 접어들 때 즈음의 사람이었을 겁니다. 내가 언제나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있었습니다. 그 익숙하면서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얼굴을 마주할 때면 저절로 몸이 배배 꼬이고, 뜨겁게 익은 볼이 부끄러워서 황급히 손바닥으로 볼을 문질러 열을 식히곤 했습니다. 얼굴이 빨개, 하고 누가 말하면 더워서 그렇다는 뻔한 변명조차도 하지 못한 채 귀까지 붉어졌습니다. 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나는 그 때 그 어린 머리로 어렴풋이 짐작했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몸에 열이 오르는 것. 피가 폭발할 것처럼 뜨겁게 들끓는 것. 고동소리가 옆 사람에게 들킬 정도로 크게 울리는 것.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는 것. 풋풋하고, 강하고, 숭고하며, 아름답고, 행복한 것.
그렇지만 당신을 마주할 때 나는 피가 차갑게 식었습니다. 심장도 멈췄습니다. 온 몸이 얼어붙었습니다. 어떠한 얼굴로 당신을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낡아서 바랜 눅진한 냄새가 날 뿐입니다. 내쉬는 숨에도 감정이 흐트러질 만큼 약했습니다. 만약 제 3자의 입장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본다면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할 조잡한 3류 영화일 것입니다. 가슴이 벅차오르지도 않고, 위대한 것을 담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끝이 행복할거라는 것도 나는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애초에 우리는 너무 뒤틀려 있었고 잘못된 장소에 있었고 잘못 만났습니다. 내 안에는 납작하게 깔려 부글거리는 숨겨진 광기만 있을 뿐입니다. 이 세계 밖에서 정했던 사랑의 정의가, 여기에서는 단 하나도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라면 충분히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큰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지 말입니다. 실제로는 어떤 날붙이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내 손아귀에 수없이 파고든 수십, 수만, 아니, 수천 개의 날붙이가 보이지 않습니까? 당신은 어쩌면 비겁하게도, 당신이 짓눌러 삼킨 존재가 당신을 절대로 미워할 수 없다고 장담합니까? 동정심과 죄책감을 배제하고서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아니면 동정심과 죄책감을 배제하고서는 사랑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궁금합니다. 당신에게 사랑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랑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특정한 존재만 할 수 있습니까? 오랜 시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까? 꼭 닮은 부분이 있어야합니까? 만약 내가 정의하는 사랑과 당신이 정의하는 사랑이 다르다면, 나는 지금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까?
*
곱게 자란 들꽃이었다. 크게 화려하지도 특출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자란 것도 없었다. 언젠가는 팽팽하게 근육을 당기듯 꽃잎을 활짝 피워 만개한 뒤, 순례에 따라 천천히 져 갈 꽃이다. 나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푸른 줄기를 틀어쥐었다. 줄기에는 아직 작은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돋아 있었다. 줄기가 닿은 지문으로부터 희미한 전율이 흘러들어왔다.
아, 이것이 정말로 살아있다는 것인가. 크게 흉진 것도 없이 건강한, 말끔한 생명.
위태롭게 휘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나에게 전혀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 아직은 오므라들어 있는 꽃봉오리에서조차 그 어떤 위협의 전조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나에게는 치명적인 위협과도 같았다. 꽃봉오리 안에 독을 품고 있지도 않을 것이며, 꽃봉오리 속이나 줄기 속에서 고약한 악취를 뿜어 만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꺼리게도 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 보았고 처음 접하는 생명이었지만 나는 감히 그렇게 단정지었다. 완벽하게 꺾는 데는 절대로 망설임이 없어야 하니까.
나는 주저함도 없이 줄기를 꺾었다. 뚜둑, 하고 끊긴 절단면에서는 피처럼 진득한 수액이 흘러나왔으나 그마저도 고요할 뿐, 수액이 묻은 손이 아니라면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조용했다. 내가 귀를 막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은 이 들판이 처절한 비명소리로 가득 찼을지도 모른다.
나는 물기 어린 꽃봉오리에 가만히 코를 댔다. 식물 특유의 싱그러운 냄새와 함께, 미세한 젖내가 났다. 그냥 두었다면 언젠가 톡 하고 온전히 꽃을 틔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두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가냘프게 숨을 쉬고 있을까 봐 지레 겁먹은 나는 날이 선 손끝으로 거칠게 줄기를 짓이기고, 몸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이빨로 꽃봉오리를 씹었다.
지나치게 씁쓸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조금의 풀 향기, 그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나는 남은 잔해를 담담하게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흉측하게 덩어리져 꽃이었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그 모든 것들이 나 자신조차 제대로 확인해보지 못한 암흑 너머로 추락해 갔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속이 뜨거워서, 목구멍 너머로 넘긴 그 덩어리들은 형체도 없이 타버렸을 것이다. 심장 부근부터 끓어오르는 온기가 곧 미세한 핏줄까지 두근거리며 퍼져 온다.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불쾌한 감정이었지만 묘한 쾌락이 느껴지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
끝이 다가옴을 느낀다.
육감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무한한 세계에서도 종말을 느낄 수 있다. 그럴 때면 항상 너의 손을 꼭 잡곤 했다. 두려워서였다.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끝나버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도망치고 싶다.
*
언젠가 딱 한번, 자고 있는 당신의 가슴팍 위로 귀를 대서 심장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작지만 열심히 뛰는 고동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위에 누워 시계소리처럼 규칙적인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잠든 적이 있습니다. 내 심장은 뛰지 않는데, 내 맥박은 뛰지 않는데 당신의 심장은 너무도 건강하게 뛰는 게 얄미워서 몰래 기분나빠했던 적이 있습니다. 내 심장은 이렇게 뛰겠구나, 하고 짐작해보며 안심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나서 느낀 당신과 나의 거리감에 내심 섭섭함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겉모습이 나와 똑같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나와 너무도 다르다는 걸 깨닫고 눈물지은 적이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 처음 느껴 본 따뜻함에 저절로 눈이 감긴 적이 있습니다. 당신을 처절하게 미워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그 너덜너덜한 감정에서 사랑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그 온기와 심장의 소리가 내게 전해져온 것만으로도 사랑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당신은 자면서 이따금씩 앓곤 해요. 나는 괘씸하다고 느끼면서도 안타까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잠꼬대가 너무도 괴로워 보이니까. 내 마음까지 안좋아질 만큼 괴로운 잠꼬대니까. 당신은 어떻게 나를 그렇게 짓밟아 놓고, 남의 고통따위는 느끼지도 못하는 냉혈한처럼 아무렇지 않게 나를 이곳으로 내몰아 놓고 이다지도 고통스럽게 앓습니까.
나를 왜 감정의 바다로 떠밀어 버립니까. 당신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척 하면서, 왜 나를 애끓는 감정으로 괴롭힙니까. 나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이곳으로 내몰았다는 것을. 깊은 어둠 속으로 빠뜨려서 수도 없이 오랜 시간을 앓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고서 나는 마음에 가시를 잔뜩 세우고 곧바로 당신을 죽이려고 했는데 당신은 그조차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잠든 당신 앞에서 절망한 적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당신보다는 쓸데없는 감정에 휘둘린 내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증오심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너무 오랫동안 혼자 둬서, 거대한 시간 앞에서는 그 어떤 다짐도 오래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 앞에서는 나도 어김없이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상처입어서 더 이상 서로에게 상처 입힐 의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저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질 뿐이었습니다. 미안해서도, 안타까워서도 아니었습니다. 각자가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너무 아프고, 당신도 너무 아프니까. 단지 그 뿐.
나도 너무 아팠습니다. 당신이 나와 전혀 다른 존재라는 걸, 아예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자각하게 될 때마다, 당신이 자꾸만 자라서 나와 멀어지는 것 같을 때마다, 점점 이 세계의 끝이 오는 것 같다고 느낄 때마다, 당신에게 받은 기억이 너무도 선명한데도 그와 정반대로 당신을 향한 마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가는 걸 느낄 때마다, 당신을 미워하는 마음조차도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사랑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이것을 설명할 수 없다고 느낄 때마다, 그 고통이 당신과 함께 있는 것으로 나아지지 않을 때마다.
당신이 깨어나고, 다시 살아나서 나와 함께 지낼 때, 내 손을 잡을 때, 나와 눈을 마주칠 때, 가벼운 대화를 나눌 때, 그저 같이 시간을 보낼 때, 그냥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는……상처를 입힌 당사자가 그 상처를 어루만져주는데도, 그 때와 똑같은 눈으로 나를 보는데도, 그 때와 다름없는 손으로 나에게 접촉하는데도 나는…….
*
나는 다른 것보다도 외로움이 제일 무서웠습니다. 지금 상황만 봐도 그렇듯이, 외로움이야말로 모든 나쁜 일의 시초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갈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도 나도 외로움 앞에 처참하게 무릎꿇었고, 외롭다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을 정당화시켰습니다. 서로의 눈을 가리고 괜찮다고 다독였습니다. 외로움 앞에서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는 세계가 좋다고 느껴졌습니다.
지겹지만 차라리 안정적인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언젠가 이대로 모든 게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하고 말했을 때 당신은 말없이 내 손을 잡았습니다. 단지 손을 잡은 것만으로도 당신이 나와 같은 생각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더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보지 못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손가락질 할 사람도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전부 지워져버려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 그냥 이대로 전부 다 사라져버렸음 좋겠다. 당신과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만 남기고 전부, 전부 다 없어져버렸음 좋겠다.
그 날은 당신도 나도 밤새 앓았습니다. 은근하게 끓어오르는 토기와 욱신거리는 머리, 떨리는 숨을 부여잡고 우리는 서로를 필사적으로 다독였습니다.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계의 신인데 아무것도 손댈 수 없었습니다. 서로를 안심시켜주려고 서로의 등을 어루만지며 하염없이 떨었습니다.
당신을 놔야한다는 생각. 나의 죽은 손으로는 더 이상 당신을 붙잡지 못한다는 생각이 나를 재촉했습니다. 나는 죽은 사람이지만 당신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나는 꿈 속에서 영원히 살아도 괜찮은 존재지만 당신은 꿈 속에서 지내면 안되는 사람이 아닙니까.
*
어째서, 너는 나를 용서하지?
나는 당신의 질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꾸했습니다.
힘들어서. 너무 지쳤거든. 복수와 증오는 손잡이가 없는 불친절한 칼 같아서 꽉 쥐고 있으면 내 손도 잘려나가. 그렇게 해서 생기는 상처가 상대를 찌르고 있는 상처보다 더 커지면, 그 때는 놔야 할 것 같다는 고민에 시달려. 상대의 숨을 성공적으로 끊어 버려서 칼을 놔버렸을 때도 칼이 파고든 자리가 춥고 허전해서 아무것도 못해. 절대로 그 부위엔 다시 살이 돋지 않아. 그 칼을 꽉 쥔 순간부터, 아무것도 멈출 수 없어.
지금 이 순간의 나는 너무 지친거야. 어떤 세계의 나는 지치지 않았을지도 몰라. 아직도 숨어서 칼을 꽂아넣을 곳을 궁리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혹은 너에게 칼을 꽂아넣고 복수를 마쳤을지도 모르지. 지금의 나처럼 손이 잘려나가 어쩔 수 없이 포기했을 수도 있고, 애초부터 칼을 쥐지 않았을 수도 있을 거야.
난 지쳤어. 부정하고 싶지만 너에게 연민을 느껴. 조금은, 너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어. 그러면 안된다는 걸 스스로가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이 세계에서 지내면서 강렬한 감정들이 전부 희미해져버렸어. 마치 물에 젖어 번져 가는 책의 잉크처럼. 해봤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아무것도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어. 너를 찌르고 베어도, ……결국에는 그 무엇도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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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명확한 이유는 이거야. 당신을 사랑해. 당신이 내 손에 입맞추었을 때야. 내가 나를 증오하는 것처럼 더럽게 피범벅을 만들어 놓은 손에 당신은 입맞췄어. 당신을 죽이지 못해 안달한 손이었는데. 나와 똑같은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나와 똑같은 입술을 맞댔어. 사실은 용서한 게 아니야. 당신을 사랑한 거야. 나는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았고 그 어떤 복수도 하지 않았어. 다만 사랑했어.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이 세계에 들어와선, 점점 자라는 당신을.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나와 달리 미세하지만 손이 자라고,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눈이 깊어지는 당신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당신을.
이제 당신은 주황색이 섞인 밝은 갈색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아. 잘 익은 홍시 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지 않아. 나와 똑같은 그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아. 당신과 손을 맞댈 때면, 딱 손톱 끝에 솟은 초승달만큼 당신의 손이 더 컸지. 함께 누울 때면 당신의 머리카락이 좀 더 멀리 뻗어 나갔지. 같이 다리를 뻗고 앉을 때면 나의 발꿈치는 당신의 발꿈치보다 아주 조금, 뒤에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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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신이기를 그칠 때 비로소 악마이기를 그친다. 사랑은 신이 되기 시작하는 순간 악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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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깨어날 시간이다.
직감적으로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서럽게 울고싶은 기분을 느낀다. 이게 처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더듬어본 기억 속에선 그랬다. 돌아보지도 않은 채 너가 어디서, 라고 묻는다. 어디든지, 라고 답하려 했지만 슬쩍 말을 고쳐 여기서, 라고 대답했다. 너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은 채로, 다시 물었다. 왜 여기가 꿈이라고 생각해? 사실 내게 명쾌한 해답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곳이 꿈이라고 확신하니 점차 맘에 걸리는 게 없어졌다. 이곳이 꿈이라면 이곳에서 너를 죽여도, 너를 사랑해도, 전혀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깨어나면 없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나는 네 성경을 대신 덮었다. 지독히도 달콤한 꿈이었다. 여기에 있으면서 나는 내가 행복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정말 용서받지 못할 생각이었지만, 내게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길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므로 이곳은, 꿈인 것이다. 내가 아는 세계는 이렇지 않아. 늘 나를 떠나고 싶게 만드는 곳이었어.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없었어. 밥 먹는 순간이 기다려질 정도로 맛있는 음식도, 누군가를 상처입히고 상처받는 대화도 없었어. 세상은 언제나 내가 도망치고 싶었던 곳이야.
아, 너를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를 보고 느꼈던 감정이 질투와 파괴심이 아니라 동경과 호기심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네가 울지 않기를 바랐다. 죄책감이 날 짓누르는 걸 느낀 나는 네 뒤의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한다. 어떻게 너를 위로해 줄지 생각하면서.
하지만 나는 끝까지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찾지 못한다. 슬픔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감싸 줄 용기도,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잡아 줄 용기도 없었다. 눅눅한 공기가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흔들리고 있다.
울지 마. 너가 울면, 이 세계도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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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감정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고 또한 그것에 대해 무감각하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엔 그 감정으로 인해 무너질 것이며, 그 감정을 따라 당신을 나에게 온전히 내 줄 것이고, 그 감정이 모든 상황을 종결시키고 당신을 마무리지을 것입니다.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랑은 뜨겁게,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당신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영원히 불타는 것은 지옥에 있다는 것을, 흥분한 야생마의 발은 누군가를 껴안을 수 없다는 것을, 따뜻한 것이 가장 오래 간다는 것을, 사랑은 물처럼 흐른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은 물과 같아서 거칠고 힘차다가도 어느순간 잔잔해지고 약해지며, 좁다가도 탁 트이며, 맑았다가도 혼탁해지며, 불처럼 뜨겁다가도 얼음처럼 차가워집니다.
내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지요. 사랑에 시간을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구요. 우리가 창조해낸 세계가 어떤 시간을 가지고 있을 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우리 세계에선 시계의 큰 눈금이 열두 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항상 겨울일 지도 모릅니다. 낮과 밤 자체가 없어, 항상 밝거나 항상 어두울 지도 모릅니다. 하루가 단 10분일지도 모릅니다. 1년이 단 하루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아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이 세계의 시간을 정의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함께 있지 않습니까. 그것으로, 모든 걸 증명할 수 있지 않나요.
당신은 믿습니까. 당신이 사는 선과 내가 사는 선이 단 한순간 맞물려서, 그 교차점에 생겨난 우리의 세계를요.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질 꿈같은 세계지만 이 세계에서 눈을 뜨면 과연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 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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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신 같은 건 없었다. 단지 내가 너에게 그 권한을 부여했을 뿐이다. 그러자 너는, 내 안에서 빛을 만들었다.
너는 나의 신이야. 무지하니까. 직접 나서서 노력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니까.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으니까. 앞날을 예언할 수 없으니까. 너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할 수 없으니까. 날 수 없고, 물 위를 걸을 수 없으니까. 다시 살아날 수 없으니까. 누군가의 병을 낫게 해줄 수도 없으니까. 기적을 만들 수도 없으니까.
너는 서툴러. 나태하고 무기력해. 무모하고 제대로 판단할 줄 모르지. 쉽게 감정에 휩쓸리고 늘 올바른 선택을 하지도 않아. 가끔은 치명적인 유혹에 혹하고, 옳지 못한 일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며,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못된 충동도 느껴. 두려워하고, 경박하고, 무심하고, 우유부단하고, 금방 싫증내고, 욕심 많고, 수줍음을 타.
하지만 자신을 믿는 자가 기적을 일으키게 하는 것, 그것이 신이지. 그러므로 너는 신이야. 나에게 기적을 만들어 주었으니까. 설령 그 기적이 극악의 확률로 일어날 일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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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세상이 뒤집어져서 모두가 나를 용서한다고 해도, 너는 날 용서하지 마.
나는 종말 앞에서 너에게 수십 번이고 다그쳤다. 다급한 나와 달리 너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은데, 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내 눈물까지 대신 흘려주려는 듯 손이 내 볼에 닿자마자 너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너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린다. 너의 눈에서 눈물이 둥그렇게 굴러떨어짐과 동시에 이곳에 파도가 쳤다. 물이 밀려온다. 우리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벽과 바닥을 이루고 있던 페이지가 차례대로 무너졌다. 우리가 같이 곱씹었던 문장들이 우리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지 않으므로, 살기 위해 허우적대지 않는다. 넘쳐 흐르던 문장들은 이내 부서진 세계의 밖으로 전부 흘러 나간다. 텅 빈 세계의 속을 그나마 채워주던 건 문장들이었는데, 문장이 전부 흘려내려가니 이곳에 남은 것은 너와 나 단 둘 뿐이었다. 애가 닳은 너가 내 손을 연거푸 꽉 잡는 게 느껴진다. 정말, 정말 마지막이구나. 너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로 끝이 올 줄은 몰랐어. 아니, 사실 알고 있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어……. 눈물에 젖은 입술이 작게 떨고 있다.
나는 순간 너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조차도 왜 그랬는지 모를 정도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내가 너무나도 닮고 싶었던 그 손목을 휘어잡자, 너는 눈동자만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안아봐도 될까. 파도가 연달아 치는 바람에 목소리가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전해지긴 한 것 같았다. 너는 별말없이 웃기만 했다. 내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자 너는 어서 오라는 듯 내가 잡지 않은 다른 쪽의 팔을 환하게 벌려 보였다.
나는 처음으로, 직접 무언가를 끌어당겼다. 끌어당겨 내 품에 넣었다. 미칠듯한 온기가 내게 파고들고 있었다. 따뜻해. 너는 그렇게 말하면서 서서히 녹아내린다. 따뜻한 눈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발끝부터 천천히, 너는 녹아내린다. 어둠이 가득 차 있던 세계가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한다. 나는 잠에 취해 있는 것 같았던 의식이 점점 더, 강하게 끌어올려짐을 느낀다. 꿈에서 깨기 직전의 느낌이다. 꽉 쥐고 있던 손도 녹아내리고, 너의 둥그런 어깨와 갸름한 등까지 빛에 삼켜졌다. 이곳을 전부 꿈이었다고 믿더라도, 나의 존재는 현실이었다는 걸 잊으면 안돼.
너의 얼굴이 순간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의 제일 민감한 살이 서로 짓눌리는 걸 느끼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이윽고, 이곳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완전히 비워졌다. 공허하다. 한 여름밤의 꿈도 결국엔 끝이 났다. 이제는 눈 뜰 일만 남았고, 이곳에서의 기억은 햇빛에 종이가 바래듯이 천천히, 변질되어 갈 것이다. 그렇다 해도, 정말로 행복한 꿈이었지. 모든 걸 다 바칠 만한 사랑을 했어. 나는 마침내 그것을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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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도 깰 수 있지만 현실에서도 깰 수 있습니다.
나는 오랜 잠을 잡니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던 당신처럼 기나긴 잠을 잘 것입니다. 똑같이 어둡지만 나는 기억을 붙잡고 어떻게든 버틸 겁니다.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가고 결국엔 나의 모든 것이 소멸하겠지만 그 때까지 어떻게든 견뎌야 하겠지요. 내가 처음의 그 깊은 어둠을 견딘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에겐 꿈이었지만 나에겐 현실이었습니다. 눈을 떠도 나는 꿈에서 깨지 않습니다. 아니, 나는 애초에 꿈을 꾼 적이 없습니다.
내가 언젠가 꿈을 꿀 때, 그 광활한 꿈 앞에서 지치고 헤맬 때, 당신도 내게 신이 되어줄 수 있습니까. 당신도 나를 위해서 눈을 뜰 수 있습니까. 아니면 꿈이 아니라 당신의 세계로 나를 이끌어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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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밭길을 걷는 것도, 꽃밭을 걷는 것도 전부 나와 함께. 너가 용서를 구해야 할 대상이자 용서해야 할 존재. 너와 평생을 함께했던 동반자. 너의 이상향. 구원자.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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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간론파 어나더 글 합작에 참여했던 글.
맨 처음 등장했던 성경 구절은 고린도전서 13장의 내용이다.
"사랑은 신이기를 그칠 때 비로소 악마이기를 그친다. 사랑은 신이 되기 시작하는 순간 악마가 된다."
이 부분은 C.S 루이스의 '네 가지 사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