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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마주쳤던 동공, 가까이 가면 나는 그 사람만의 향기, 같은 하루를 공유하며 교감했던 대화. 좀 더 깊숙히 들어가면, 시원스레 휘어지는 눈이나 어떨 때는 그 나이대답게 당돌하다가도, 어떨 때는 성숙하게 가라앉는 목소리. 바라보는 눈빛 속에 담긴 온기, 강직하되 날이 서 있지 않은 말투 같은 것들. 이것은 단순히 일 때문에 몇번 써먹고 머릿속 깊이 처박아두는 그런 알량한 기억과는 다릅니다. 가장 아픈 곳에 못을 박듯 박아두어서 녹이 슬어버리게끔, 그리고 숨을 쉴 때마다 그 기억의 녹이 혈관을 타고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져 나가게 해야 하는 기억입니다. 그래서 거울을 볼 때면 온몸에 퍼진 녹 때문에 도저히 잊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설령 그 기억이 녹이 슬어 색이 바래고, 부패되어 구부러지더라도, 또한 그것이 결국엔 나를 죽음으로 이끈다고 하더라도, 몸으로 꽉 쥐고 놓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때 당신을 기어코 놓아버렸으니까 말입니다.
나는 잘 지낸다. 식음을 전폐하고 하루하루 죽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몸 속에 고인 눈물을 전부 쏟아내려고 일부러 기분을 울컥거리게 만들지 않는다. 죽기 위해서 손목을 긋고 목을 매지도, 총구를 머리에 겨누지도 않는다. 그저 살아갈 뿐이다. 누군가와 말을 섞고, 가벼운 눈짓을 주고받고, 적당한 식사를 한다. 나는 하루하루 살아간다. 너가 없어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나는 잘 지낸다. 근데 나는, 이미 죽은 것 같다. 더 이상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니, 모든 세계가 죽은 것 같다. 아무도 숨을 쉬지 않는다. 그것도 아니다. 모두가 숨을 참고 있다.
*
숨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니.
총을 쏠 때는 숨을 참아.
팔이 흔들리지 않도록, 그래서 나의 표적이 엇나가지 않도록.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언제나 숨을 참고 있었어.
흔들리지 않도록. 나 자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빈소는 한적했다. 이미 저녁 시간대에 한차례 사람들이 몰려왔다 빠져나간지 오래였고, 그 시간이 지나자 찾아오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바빠서 볼 틈도 없었던 시계바늘이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어서고 나서야 그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여기서 그가 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정신적으로 고단한 일이었다. 이곳에 온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금세 초점이 흐려졌다. 자꾸만 깨물었던 입술이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회상도 하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그저 조금 쉬고싶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렇게까지 정신적으로 몰아붙여지는 일은 그에게 난생 처음이었다. 가슴이 짓눌려지는 감각에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고, 가까스로 내뱉는 숨은 귓가에 환청처럼 울려 주변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팔의 안쪽을 꼬집는다. 벽에 기댄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단순히 벽에서 몸을 떼는 일도 억지로 힘을 끌어올려서 해야 할 정도로 그는 확실히 지쳐 있었다.
부옇게 흐려진 시야 속에는 만발한 국화꽃들이 잔뜩이었다.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탓에 흐려져버린 국화꽃들은 마치 영화에 등장할 법한 무언가의 영혼 같았다. 그 사이에 있는 얼굴은 그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다. 하얗게 둘러싸인 그 얼굴은 국화꽃의 색처럼 말갛게 웃고 있다. 그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시야가 흐려져도 그 얼굴만은 또렷했다.
너다. 그건 너의 얼굴이었다.
너가 이렇게 되어버릴 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 날은 항상 곁에 붙어있던 그조차 불안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촉이 좋은 그는 언제나 너를 걱정하긴 했지만 너의 확신이 가득 찬 태도에 이내 그도 불안을 거뒀다. 너의 안정적인 목소리와 자신감에 찬 얼굴은 묘하게 다른 사람을 안심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평소 걱정과 불안이 많던 그까지도 안심시킬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었다. 괜찮아, 이 한 마디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걱정을 멈추고 잠자코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너는 죽었고, 이제 더 이상 너와 함께 할 일은 없을 터였다. 다시는 네 모습을 볼 수도 없었다. 그는 너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어색했다. 실감이 나지 않으니 눈물도 솟지 않았다. 갑자기 바닥이 툭 꺼지면서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사진보다 너의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먼저 쓰게 될 줄은 몰랐다고 스쳐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그가 아버지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것도 처음이다. 어색했다. 모든 게.
*
장례식은 주말을 끼워 3일 동안 치르고, 그 중 이틀 째에 입관을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입관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건물 한 귀퉁이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는데, 제대로 염할 시신이나 찾을 수 있었겠는가. 매캐한 잔해 속에서 겨우 찾을 수 있었던 건 타버린 장갑과, 온전한 형태를 찾기도 어려운 조각난 시신 뿐이었다. 그 때문에 입관은 생략하고, 곧바로 화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화장할 수 있는 너의 흔적은 얼마나 될까. 사람들이 너의 입관에 대해 이것저것 떠드는데도 그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3일 중 하루밖에 있지 못했다. 세상은 그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바쁘게 돌아갔고 그는 세상에 맞춰서 뛰어야 했다. 사실상 그런 직업이다. 그 또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목숨을 걸고 현장에 나섰고, 그런 그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항상 목덜미 뒤에 끈덕지게 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어두컴컴하고 기분나쁜 것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같이 현장을 다니는 동료들과 상사들, 심지어 아버지의 목덜미까지도 그 거무튀튀한 것이 붙어 있었다.
죽음을 달고 현장을 나돌아다니는 그 모습들이, 어떻게 보면 처참했다. 그럼에도 계속 현장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혹 면식이 있는 누군가가 그 죽음에 잡아먹혀버렸다고 해도 그는 아, 결국, 이라는 말로 모든 감정을 일축해버렸다. 그에게는 그런 감정을 느낄 틈이 없었다. 눈물 한 방울을 흘릴 시간에 다른 사람이 피 한 방울 안 흘리게 하는 것이 중요했고, 자신의 피는 흘릴지라도 남의 피는 지켜야 했다. 언제 죽음이 자신을 덮쳐 버릴지도 모르면서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지켜 냈다.
그런데 삐끗하면 숨이 잘려 나가는 그런 곳에서, 그는 길고도 긴 영원을 꿈꿨던 거다. 너와의 영원을. 너랑, 조금만 더, 이왕이면 영원히, 끝까지, 친구로 남을 수 있기를.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로 터무니없는 소원이었지만 아무것도 몰랐을 그 때의 그는, 정말로 간절히 바랬었다. 너와 그가 죽음으로 인해 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가 예상 못 했던 건 아니지만. 몰랐던 건 아니지만. 사실 마음 한 켠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어쩌면 당연했을 지도 몰라. 그의 안에서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린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작은 소망마저 품을 수 없단 말인가. 그는 한탄했다. 정말로 믿고 싶었던 그 사실이 순식간에 깨져버렸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묵직한 고통이 목구멍을 짓눌렀다.
*
너는 이 근처에 맛있는 식당이 없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가끔 그가 밥을 사 줄때면 사줘도 사주는 것 같지가 않다고 툴툴거렸다. 삐죽거리는 듯한 말투였지만 표정만큼은 개구지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정말로 불만스러워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느긋하게 풀어보려는 너만의 방식이다. 그는 늘 현장 속에서 긴장한 채로 다녔기 때문에 이렇게 몸과 머리를 쉬게 하는 순간이 그렇게 중요할 수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너가 함께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쉬게 하는 것에 너무도 서툴렀고, 그 때문에 겪은 고통이 깊었다.
어쨌든 간에,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는 너를 바라보면서 어쩌면 이 시간이 계속될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안도했다. 자신도 이런 삶을 잠깐이나마 즐길 수 있다는 것에.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여긴 지금 굉장히 맛있는 식당이 생겼어. 제일 먼저 너에게 알려주고 싶었는데. 너가 제일 기뻐할 만한 사실인데. 나 대신 그 위험한 현장에 뛰어든 너를 위해서, 이번에도 고마웠다며 내가 밥을 사줘야 하는데. 약속했었는데.
그래야 했는데, 너가 없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그는 문득 너의 죽음을 실감하고는, 모자를 고쳐 썼다.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무언가를 움켜잡으려는 듯이 자꾸만 쥐었다, 폈다 한다. 강박증이다. 그 때 환하게 웃으며 돌아서는 너를 잡았더라면. 너의 팔을 이렇게 움켜잡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너는 그가 소리쳐 불러도 끝까지 멈춰 서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 말라며 천진난만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내게 지어준 미소가 너무도 듬직하고, 다정해서, 달려가 붙잡을 생각조차 못했다. 그는 정말로 괜찮을거라고 생각했다.
잘 해낼 거야. 그럼, 당연하지. 나보다 뛰어난 녀석인데.
*
생각까지는 제어할 수가 없어서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너는 가끔씩 무의식중에 튀어나오곤 했다.
그가 기억하는 밤이 있다. 어둑하게 푸른빛이 깔려서, 그와 너가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물들던 밤이었다. 그 기이한 세계에는 경찰이고 뭐고 없었으면 좋겠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지친 얼굴은 그날따라 유독 더 고독해보였다. 유난히 지친 탓인지, 둘 중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원래라면 너가 먼저 살갑게 말을 붙였을 테지만, 그날은 특이하게도 그랬다. 실없는 농담이라도 할 여유가 없었던 거다. 그가 먼저 일어날까, 하고 생각하자마자 너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킨조.
그는 평소와는 달리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너를 금방 눈치챘다. 똑같이 가라앉은 두 쌍의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가끔 우리가 너무 감당하기 힘든 것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이 당연하게 우리를 죽여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단순히 발을 삐끗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지고 있던 게 전부 부서져버린다는 게 무서워.
경찰이 되고 싶어. 초고교급의 경찰이 되어서, 더 많은 공부를 하고 더 많은 것을 지키고 싶어.
하지만 그러면서도 두려워. 내가 지키던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릴까 봐.
심지어는 내가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감쌌던 것들이 사실은 전부 환상이었을까 봐.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고 이제까지 해왔던 게 모두 잘못된 일일까 봐.
이제껏 괜찮아, 괜찮아 하고 다독였지만 정말로 우리가 쓰러져버리면 어떻게 해야할까.
내가 필사적으로 앞을 막아서서 지켜낸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옳지 않았던 거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주변에 눈길을 주지 않고 미친듯이 달려왔지만 정말로 이게 옳은 일일까.
그토록 우리가 추구하던 정의는 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가고 있는 곳에 있을까.
킨조, 우리는 어떡할까.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다고 해도.
그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술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침묵이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있었다. 너뿐만 아니라 그도 성대를 울리지 않았다. 길게 늘어진 침묵을 넘어가기엔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말라붙은 입술껍질을 주욱 뜯어내다 피가 나오기 직전에 멈추는 것처럼, 얇고 아슬아슬한 침묵이었다. 너도 더 말하는 걸 그만뒀다. 말하기가 버거웠다. 말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른 척 외면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기억하기로, 그는 끝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 십 분 정도,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너에게 돌아가자는 듯 눈짓을 보내고, 같이 돌아왔다. 그게 전부였다.
어떡할까. 어떡할래. 그는 아직도 대답하지 않았다. 잊어버린 것도 아닌데 아직도 답할 수가 없었다. 설령 너가 아직 그의 곁에 있었다고 해도 그는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득 이렇게 기억이 차올라 오면 그는 독이라도 차오르는 것처럼 괴로워했다. 치밀어오르는 토기와 두통 속에서, 그는 생각했다. 사사키, 나 정말 어떡하지.
*
너의 장갑은 타버려서 낄 수도 없었고 그는 원래 장갑을 끼는 편도 아니었지만, 장갑은 뒷주머니에 항상 넣어 다녔다. 그렇게 다니다 보면 장갑을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게 아니라 꼭 후회를 넣고 다니는 것만 같았다. 무거운 것을 지니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걸음이 무거워졌다. 그건 총의 무게보다도 더욱 무거운 것이었다.
*
빈소에 찾아온 사람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그를 위로했다. 가장 절친한 사이였는데, 안타깝구나. 사람들은 그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거나 말없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신의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오히려 그가 말없이 위로해줘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든 그를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주려고 애쓰는 모습들이다. 속이 뒤틀린 그는 어색하게 서서 그 위로를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히 울었다. 울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침울한 표정이었다. 반면 그 모습 뒤로 바라본 영정사진 속의 너는 그를 보며 웃고 있다. 그가 완벽한 상태에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칠 때마다 그 압박감을 부드럽게 풀어주던, 그런 표정이었다.
아버지는 문득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앞으로 이런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일에 흔들리지 말고 더 강해져야 한다는 말은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그가 아버지의 동료들을 망설임없이 쏴죽였을 때도, 처음 총으로 사람을 죽여 봤을때도.
그렇다면 아버지, 내 손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게 언제든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흔해진다는 것인가요. 그는 가까스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럴 바엔 차라리 곁에 아무도 없는 게 낫잖아요.
*
그는 저절로 고해를 시작했다. 네 모습 앞에서 이제껏 했던 모든 실수들을 사과했다. 일에 치여서 너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못했던 것이나 친구로서 함께 하고 싶었던 일을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가차없이 미뤄버렸던, 그런 일들. 한번만 눈 딱 감고 평범한 사람인 척 살아도 괜찮았을텐데. 나중에는 정말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나이대의 친구처럼 유명한 곳에 놀러도 가고, 여행도 가고,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는 너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영원할 줄 알았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이야. 눈물이 비죽 솟으려고 했지만 그는 그 자신을 다그치며 황급히 눈물을 삼켰다. 꼴불견이었다. 그가 발버둥친다고 해도 돌릴 수 없는 일인데, 아직도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네게 보이는 것조차도 미안해했다. 하지만 너는 다 괜찮다는 듯 웃는다. 너는 언제나 그랬다. 그에게 잣대를 들이대지도 않고 방치하지도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를 포용해준다는 것이 그에게는 얼마나 따뜻한 일이었는지. 유일하게 그의 옆에 있는 사람이었다, 너는.
아버지는 항상 그의 위에 있었고, 어머니는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울타리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분명 가족인데 그가 볼 수 있는 거라고는 아버지의 구둣발과 어머니의 흐릿한 형체 뿐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가정 속에서 그는 혼자였다. 그걸 깨닫고 텅 빈 공간 속을 허우적거리며 방황하기를 몇 년이었다.
다함께 식사를 할때도 어쩐지 혼자 식탁에 앉아있는 것만 같은 기분. 식사를 한다기보단 굶어죽지 않기 위해 뱃속을 채우는 쪽에 가까웠다. 단란한 대화는 없었다.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저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목울대가 울렁이는 소리, 스스로 자제하는 가냘픈 숨소리가 다였다. 그는 숨이 막혔다. 기침이 나오면 침묵을 깨뜨릴까 봐 조금씩 숨을 나눠 쉬며 음식을 넘겼다. 방아쇠를 쥔 것처럼, 저절로 손에 땀이 찼다.
그런 그가 조금 크고 나서 아버지를 좇아 경찰이 되자, 이제는 그렇게 다같이 식사를 하는 일도 드물어졌다. 그는 내심 섭섭해하면서도 은근히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맛있는 음식들이 식탁을 가득 채워도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심지어는 그 식사가 자기한테 내려진 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벌을 받는 것처럼 무뚝뚝하고 차가운 식사. 식사를 할 때면 살아있다는 것조차 숨겨야 할 것 같았다.
경찰이 된 후로 그는 어머니를 자주 만나지 못했다. 아버지 또한 평범한 가족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채워진 족쇄와도 같았다. 늘 아버지 뒤에 따라붙는 느낌. 킨조 츠루기라는 사람에게서 현 경시청장인 아버지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듯한 느낌. 아버지를 똑 닮았구나.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시겠구나. 절대로 떨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족쇄.
그때만큼은 그가 너를 질투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주 희미하고 엷은 감정이었지만, 그 감정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무하고도 엮이지 않은 채 '사사키 코우헤이'라는 이름 그 자체로, 그 사람 자체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는 미치도록 부러웠다. 가정이라는 건 울타리가 아니라, 내게는 감옥이었구나. 그는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
그는 그 일이 일어난 이후로 자주 악몽을 꾸었다. 그 악몽은 대부분 그가 어쩔 수 없이 방아쇠를 당겨야만 했던 사람들이나 지키지 못했던 사람들, 놓쳐 버린 범죄자들이 나와서 한가운데 서 있는 그를 끊임없이 질타하는 꿈이었다. 피에 젖은 눈알들이 일제히 그를 향하고 썩어 문드러져가는 손가락들이 그의 몸을 파고들 것처럼 가까이 다가와 손가락질했다. 그것 정도는 괜찮았다. 견딜 수 있었다. 꿈을 꾸지 않고 잘 정도로 자신을 채찍질해 피로하게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너가 그 이후로 꿈에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떤 모습이든 괜찮으니 꿈에 나와서 주먹으로 한 대 쳐도 좋았고, 정말로 염치없지만 예전처럼 웃어주면 더 좋았다. 그런데 너는 그러지 않았다. 끝까지 너다웠다. 항상 악몽에 시달렸던 나를 걱정했던거지. 혹여나 너가 나오게 되면 내게 악몽이 되어버릴까 봐. 그는 그게 무엇보다도 견뎌내기 힘들었다.
악몽에 너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잠을 더 자지 않았다. 빈소에 오기 전에도 밤을 샜다. 악몽에 너가 나오는 것보다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서글펐고, 어쩐지 울컥거리는 마음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는 멍하니 네 사진을 바라본다.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몰골과 정신상태로, 너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내가 너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어. 그는 너에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를 믿어서 죽게 됐는데 왜 예전처럼 나에게 웃어주는 거야.
나한테 왜 그래. 왜 끝까지, 나를 그렇게 보는 거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갑작스럽게 토기가 솟구쳤다. 그는 빈소를 박차고 나가, 답지 않게 비틀거리며 구석진 화장실로 향했다.
언젠가 봤던 우화가 생각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차마 말하지 못할 사실을 알게 되어 아무 데도 말하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엔 구덩이를 파서 그 구덩이 속에 외치던, 우습고도 시원해 보였던 그 모습. 그는 그를 지독히도 따라 다니는 죄책감과 후회의 일부를 변기 속에 토해 버리고 소리없이 울부짖었다. 그래도 시원하진 않았다. 그의 모습은 그저 우스워 보였다. 그게 미치도록 끔찍했다. 그는 죄책감과 후회뿐만 아니라 여러 감정이 한데 섞여서 잔뜩 비틀려진 그 구덩이에, 절규했다.
내가 그랬어요. 내가 그 애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사고가 아니에요. 전부 내 잘못입니다. 내가 그 애를 죽이고 말았어요.
*
어쩌면 좋지.
숨을 참고 있는데도 흔들리고 있잖아.
*
그는 장례식이 끝나고 여느 때와 같이 살아갔다. 속으로 그는 수도 없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런 모습을 비추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너의 빈자리를 느낄 때마다 속으로 감정을 꾹꾹 눌러담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희망봉 학원 입학 통지서를 받은 날, 그는 문을 걸어잠그고 밤새 울었다. 초고교급의 경찰. 그 칭호가 어째서 나한테.
그의 아버지는 그를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바깥 세상은 걱정말고, 마음껏 배우고 오라고 했다. 그는 말없이 집을, 아버지를 떠났다. 데리고 간 것은 너 뿐이었다. 후회를 뒷주머니에 눌러 담고, 기억을 켜켜이 쌓아둔 채로 네가 가고 싶어했던, 네가 가야 했을 그 학원으로 떠났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
너와 똑같이 웃는 사람이 있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듬직함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미소를 짓는 사람이 있어.
누구보다도 정의롭고 당당해서, 모두를 포용해주는 사람이 있어.
*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가 품에 안았던 유골함의 무게는 그의 팔에 그대로 남았다.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감각은 생생하다. 관은 쓰지 않았지만 아직 그에게는 너가 누워있는 관이 있다. 그는 아직도 너가 누워있는 관의 뚜껑을 닫지 않았다. 입관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문을 닫고, 보내줄 때가 된 것 같아.
그는 너를 입관한다. 그가 평소에 봤던 모습 그대로, 마치 자는 것처럼 눈을 감은 채로, 그렇게 깨끗하고도 맑은 상태로……. 장갑은 끼우지 않은 상태다. 타버린 장갑을 끼울 수는 없었으니까. 보통의 절차처럼 흰 천으로 너를 감아 싸지도 않았고, 그의 입관식에서는 화장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폭발과 불길에 휩쓸려 떠나버린 너를 다시 불 속으로 밀어넣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너의 관 앞에 가만히 서서 너를 내려다 본다. 그가 살면서 이렇게 많은 꽃을 본 적이 있었을까.
나는 괜찮아.
나는 잘 지내. 끼니도 거르지 않고, 잠도 평소보다 좀 더 자게 된 것 같아. 친구도 새로 사귀었어. 같이 지내는 반 친구들 모두 좋은 사람들이야. 여기서는 조금 마음의 짐을 덜게 됐어.
……많은 걸 새로 배웠어. 나를 이루던 무언가가 무너졌지만 천천히 다시 쌓았어. 무너지면 다시 쌓으면 된다는 걸, 흔들릴 때는 마음껏 흔들려도 된다는 걸, 길을 잘못 들면 되돌아가면 된다는 걸 너무 뒤늦게 배웠어. 아직도 너를 생각하면 마음 한 켠이 아프지만 점차 괜찮아질거라 믿어. 너가 바랬던 것까지 내가 전부 짊어지고, 헤쳐 나갈게. 그러니까 너도 이제는, 잘 지내.
면목 없지만……나중에, 만나게 되면, 다시 나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겠니.
그때는 다시는 놓치지 않도록, 내 손을 꽉 잡아줄 수 있겠니.
그때는 내가 망설임없이 손을 내밀게. 꽉 쥐고 놓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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